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이 글을 읽게 되기를 바란다.

아빠는 늘 열심히 살아왔지만,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길을 걸었는지, 무엇을 후회했고,
어떤 순간에 아빠 자신이 조금씩 바뀌어 갔는지.

이 글은 자랑이 아니다.
삶은 준비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깨닫고, 다시 도전하며 성장해가는 여정이라는 걸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Outlier)'를 따라,
나는 내 삶의 1막을 문화와 유산, 환경과 기회, 노력이라는 조각들로 되짚어본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처럼 얽힌 시간들.
나만의 궤적을 따라 오늘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en's search for meaning)'를 마음에 품고,
삶의 의미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되새긴다.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며,
나는 지금, 인생 2막의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다.

 

나는...

 

1장. 3월생, 빠른 성숙

나는 3월 초에 태어났다.
당시 학년제는 3월생부터 다음 해 2월생까지가 같은 학년으로 묶였기 때문에,

나는 같은 학년 중에서 늘 가장 이른 생일을 가진 아이였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서 말하듯, 이러한 빠른 생일은 조기 발달과 성숙에서 이점을 주는 것 같다.

나는 또래보다 신체적으로 발달이 빠른 편이었고, 학교생활 전반에서도 그런 차이는 있었을 것 같다.

사교육이 거의 없던 시절, 학교 수업과 교내 활동만으로도 나는 모든 방면에서 평균 이상을 해냈다.
공부, 운동, 예체능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나를 ‘팔방미인’이라 불렀다.

(물론 이른바 빠른 년생 친구들 중 나보다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한 친구들도 많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창 시절은 큰 굴곡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기대받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게 그 시절 내 삶의 리듬이었다.

 

2장. 공학도로 향하는 길

대학에서는 자동차공학을 공부했다.
엔진, 미션, 샤시 등 기계와 속도의 세계는 흥미로웠고,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분야였다.

그중에서도, 소위 ‘4대 역학’이라 불리는
동역학, 재료역학, 유체역학, 열역학은 마치 세상의 신비를 푸는 열쇠 같았다.
그 원리들을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은 단순한 공식 외우기가 아니라
‘세상은 왜 이렇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탐험이었다.

공업수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복잡한 현상을 수식으로 설명하고, 정리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학은 그 자체로 과학과 현실을 잇는 다리였다.

학과 커리큘럼 중 하나인 H 자동차와의 산학교육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교과서에 머물던 개념들이 실제 기계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기계의 작동 원리, 응용 방법, 설계상의 고려사항 등을
현장 속에서 직접 체험한 이 경험은 내 공학적 사고에 ‘현실감각’이라는 중요한 축을 더해줬다.

또한 C 언어 및 Matlab, ADAMS 등을 활용해 수치해석, 컴퓨터 응용해석 등의 과목을 접하며
머릿속의 공학적 모델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구현되는 과정에 매료되었다.
이것은 논리, 수치, 실제가 하나로 연결되는 짜릿한 체험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기계는 움직이는 수학’이고, 공학은 삶과 연결된 논리’라는 걸 몸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3장. 예외의 시작, IMF

나는 H 그룹 재단의 대학교에서, H 자동차의 요청으로 개설된 자동차공학과를 졸업했다.
기계공학과에서 분리된 이 전공은 자동차에 특화된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고,
학생 대부분은 ‘졸업 후 H 자동차 입사’라는 명확한 진로를 갖고 있었다.
선배들도 거의 예외 없이 H 자동차 연구소로 향했기에, 나 역시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나는 준비된 학생이었고, H 자동차는 이 전공을 위한 존재처럼 느껴졌고, 내 앞길은 예정된 선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믿음은 IMF 외환위기와 함께 흔들렸다.
1997년 말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는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고,
졸업을 앞둔 나는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H 자동차를 포함한 대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은 거의 전면 중단되었고,
고시나 유학을 준비하던 친구들도, 공기업을 준비하던 친구들도 모두 방향을 잃은 채 막막한 시절을 통과해야 했다.

나는 처음으로 ‘당연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후 나의 삶과 태도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4장. 정해진 길이 사라질 때, 나만의 길을 만들다

대학 졸업 즈음 찾아온 IMF 외환위기
H 자동차 입사를 당연시하던 내 미래 계획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원 진학이나 장기 취업 준비만 하며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그 시기, 마침 눈에 들어온 세계적인 독일 유압회사의 한국지사 채용공고.
그 회사에 운 좋게 입사하게 되었고, 내 커리어는 의외의 방향에서 시작됐다.

입사 후, 독일 본사에서 유압 기초부터 응용까지 직접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교육 과정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유압이라는 또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내에서는 건설기계 제조사들을 고객사로 하여 부품 및 시스템을 공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독일 본사 엔지니어들과 같이 일하며 그들의 일에 대한 열정과 태도에 감탄했고,

이런 점은 한국의 건설기계 제조사의 엔지니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건설기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고객사의 입장에서 기계를 바라보는 관점, 부품 레벨에서 시스템을 이해하는 눈이 생겼다.

이 경험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몇 년 후, 나는 고객사였던 건설기계 제조사로 이직했고,
이제는 부품 공급자에서 장비 개발자로,
외부 파트너에서 현장 중심의 R&D 엔지니어로 나아가게 되었다.

 

5장.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는 온다

자동차공학을 전공하고, 독일계 유압 회사에서 유압 시스템의 원리와 응용을 실무로 익힌 젊은 엔지니어.
나는 그렇게 다듬어진 상태로 건설기계 제조사에 입사했다.

내가 배정된 부서는 장비의 성능 시험, 평가, 최적화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첫 기종은 휠로더
주행하면서 대형 중량물을 들어올리고, 옮기고, 쌓는 파워와 정밀함이 동시에 요구되는 건설장비였다.

휠로더는 자동차처럼 주행하지만,
자동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하중을 견디는 엔진, 미션, 액슬, 유압의 복합 구동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나는 그 장비를 이해하고, 실제로 시험하고, 성능을 끌어올리는 핵심 실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운이 아니었다.
자동차공학에서 쌓은 지식과 시스템 사고,
유압 시스템의 원리를 실제로 경험한 실무 배경,
그리고 외국계 기업에서 배운 정밀한 문제해결 방식까지,
이 모든 것이 내가 그 자리를 바로 맡아도 되는 ‘준비된 경력사원’임을 증명했다.

이 시기를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
“전공, 실무, 기술의 연결고리가 완성된 순간.”

 

6장. 나는 판을 뒤집었다

휠로더를 맡은 뒤, 나는 매일 성능 시험과 계측, 분석 업무에 몰두했다.
설계 사양 대비 실제 성능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는 Verification,
그 설계가 실제 시장에서 상품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Validation,
모든 게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찜찜함이 스쳤다.
“왜 항상 사후 확인만 하지?
설계단계에서 Validation까지 예측하고 최적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질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었다.
나의 전공, 실무 경험, 그리고 대학 시절 틈틈이 익힌 C 언어와 Matlab이 그 의문에 해답을 달기 시작했다.

나는 논문과 전공서적을 뒤져 휠로더의 동력학 모델을 구성하고,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미분방정식을 도출하고, 수치해석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엔진, 트랜스미션, 액슬, 유압 및 장비 사양 변화에 따라 장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예측하는 시뮬레이션 툴을 만들었다.

그건 단순한 코드가 아니었다.
기존의 개발 방식이 정적(static) 조건에서만 사양을 검토하던 한계를 뛰어넘어,
동적(dynamic) 거동 특성까지 설계단계에서 예측하고 최적화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였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 해냈다. (지금은 상용 프로그램으로도 가능하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내가 만든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판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판을 뒤집은 사람이었다.

 

7장. 예측은 현실이 되고, 나는 중심이 되었다

내가 만든 시뮬레이션 툴은 실험실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침 신기종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기존 장비 중량 10톤에서 35톤까지 이어지는 8개 모델 전체의 주요 사양에 대해 Case Study를 진행했다.

각 모델별 부하 특성, 엔진, 트랜스미션, 유압의 매칭 조건을 분석하고,
그중 가장 효율적인 몇 가지 Power Matching 조합안을 도출해
전기종 통합 개발안으로 보고했고, 그 안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그리고 설계단계를 거친 후, 시제품(Proto) 장비가 출고되었을 때—
그 장비의 거동은 내 시뮬레이션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단지 ‘잘하는 사원’이 아니라,
휠로더 개발의 핵심 인재로 자리매김했다.

선배들의 인정
후배들의 존경,
그 모든 게 과장도 없고, 강요도 없는
실력 기반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처음부터 빛나는 별은 아니었지만,
나는 분명 그날부터 한 팀의 축, 아니 그 분야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8장. “가자!” 그리고 진짜로 해냈다

조직의 인정을 등에 업은 나는,
개발의 최전선에서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술도, 반복되는 시행착오도
가자!”는 한마디로 밀어붙이며, 동료들과 하나씩 결과를 만들어갔다.

양산화되어 신기종이 시장에 출시되고, 균형잡힌 작업성능과 탁월한 연비에 영업과 해외법인의 감사가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가장 작은 기종, 10톤 휠로더의 신형 파워트레인 개발이었다.

이 장비는 가격에 민감한 시장을 겨냥한 모델이라
원가절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였다.
나는 기존의 토크 컨버터 트랜스미션 대신,
유압 펌프/모터로 구동되는 Hydrostatic Transmission(HST)
방식을 제안했다.

효율이 좋아진 만큼,
엔진의 배기량을 줄이되 성능을 유지하는 구조로 설계를 최적화했고,
그 제안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 시도하는 방식, 수많은 시행착오, 끝없는 개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결국 양산화에 성공했고,
이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HST 방식 휠로더 개발 사례로 기록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특히 고마웠던 건,
이전 직장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의 도움이었다. 이전 직장의 부품과 시스템을 일부 도입했기 때문이다.

개발 마무리단계에서 매주 독일 엔지니어들과 컨퍼런스 콜을 하며 진행상황을 점검했다.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과 경험을 나눈 이 협업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땀과 고민, 분석과 해결 과정이
내가 지금까지 전문가처럼 보이게 만드는 핵심 자산
이다.
지식, 자신감, 실전 경험—그 모든 게 이 프로젝트에 녹아 있었다.

 

그간의 성과를 인정받아,
나는 회사 내 가장 큰 매출 비중을 차지하는 해외법인인 중국에
주재원으로 파견
되었다.

기술로 길을 열었고,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그 길을 확장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9장.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40대 초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나는 중국 법인의 시험팀 팀장으로 부임했다.
우리 회사가 중국 현지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법인을 운영 중이었고,
그 안에서 장비 성능 검증과 개발 시험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핵심 조직을 맡게 된 것이다.

리더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중국 직원들 덕분에
기본적인 팀워크를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시키는 일을 빠르게 수행했고,
나는 방향을 제시하고, 기술적 기준과 평가 체계를 리딩했다.

예전에 유럽과 미국, 일본의 엔지니어들과의 교류도 많았었고,
해외 출장 경험도 많은 편이었기에
문화적 차이나 일처리 방식의 차이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중국어도 다른 주재원들보다 훨씬 빠르게 익혔다.
자연스럽게 현지 직원들과의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했고,
업무 이해도와 인간적인 거리감이 동시에 좁혀지면서
신뢰받는 리더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가족이 함께한 안정된 생활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회사의 충분한 처우, 잘 갖춰진 주재원 환경,
그리고 주변에 상주한 많은 한국 업체들 덕분에
생활은 한국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들 교육, 아내의 생활, 나의 일 모두가 조화를 이루던 시기.
나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준비해온 것들이 처음으로 완벽히 맞아떨어졌던 순간이었다.”

 

10장. 균형은 무너지고, 시야는 넓어졌다

하지만 그 평온이 영원할 순 없었다.

중국 주재원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중국의 경제성장은 둔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건설기계 시장도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부임 이후, 현실은 예상보다 더 가혹했다.
장비 생산량은 급격히 줄었고,
급기야 한국 본사와 중국 법인 모두에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었다.

중국 조직은 인원의 50% 이상을 감축해야 했고,
함께했던 많은 동료 주재원들도 조기 귀국했다.
남은 소수의 주재원과 축소된 중국 직원들이
비상경영 체제 아래,
한 팀처럼 뭉쳐 생존을 위한 운영을 이어가야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각자 소속 부서의 역할 안에서 움직였던 주재원들
이제는 영업, 재무, 인사, 생산, 품질, 연구개발, 구매, PS, AM 등
전 부문의 주재원들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 속에서 나는
각 부문의 사고방식, 업무 우선순위,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좁은 세계에서 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동안 나는 나름의 전문성을 키워왔지만,
그건 철저히 ‘R&D’이라는 울타리 안의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조직 전체의 생존’이라는 더 큰 판을 고민하며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위기는 나를 흔들었지만,
동시에 내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기술을 넘어서 사업, 조직, 경영의 관점으로 나아가는
내 경력의 또 다른 전환점이 시작되고 있었다.

 

11장. 기술에서 전략으로, 나는 방향을 바꾸었다

귀국 후, 회사는 내게 다시 설계나 시험 부서로의 복귀를 제안했다.
지금까지의 경력을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고,
주변 모두가 예상한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제품기획.

‘기술쟁이’로는 할 만큼 했다고 느꼈다.
설계하고, 시험하고, 검증하고, 최적화하는 일을
누구보다 집요하고 치열하게 해왔고,
그 결과로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변하고 싶었다.
시장은 기술만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제품도 더 이상 성능만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변화하는 대외 환경에 맞는 제품을 기획하고,
연구개발 조직을 융합하여
단순히 '신제품'이 아닌, 비즈니스 관점의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자.
그리고 내 시야를 넓히자.”

그렇게 나는 제품기획팀으로 이동했고,
기능화된 매트릭스의 복잡한 조직 내에서 필요한 기능들을 조합해
CFT(Cross Functional Team)를 구성해 프로젝트를 이끄는 업무이다.

단순히 조율자가 아닌,
기술적 깊이를 갖춘 전략 리더,
외부 환경을 읽는 감각을 가진 개발방향 및 사양 설계자,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소통의 중심축
이 되고자 했다.

나는 다시 다짐했다.

“전문지식과 리더십, 그리고 외부를 읽는 눈을 가진 엔지니어가 되자.”

기술은 나를 키웠고,
이제 그 기술을 기반으로
제품의 방향, 조직의 힘, 사업의 기회를 설계하는 사람이 되려 했다.

 

12장. 성장의 벽 앞에서, 나는 현실을 바라보았다

제품기획이라는 새로운 길에서,
나는 기술과 전략, 조직과 시장을 연결하며 다양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 가지 묵직한 현실이 자꾸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회사에는 SKY 출신, 특히 S 출신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요즘은 수도권에 본사를 둔 기계회사가 많아졌지만,
과거엔 우리 회사가 거의 유일한 ‘메이저 기계회사’였다.
그만큼, 수도권의 인재들이 이 회사로 몰렸고,
당연히 학벌 중심의 인사구조와 파워 구조는 굳건했다.

피라미드 구조의 위로 올라갈수록,
그 ‘보이지 않는 학벌의 벽’은 점점 더 명확해졌고,
나는 어느 순간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특화된 지방대 출신으로,
H 자동차를 목표로 만든 전공을 이수하고,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그 길은 그 벽 앞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듯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아, 이제는 남은 삶을 위한 실용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기술자로서, 전략가로서, 충분히 치열하게 살았다.
이제는 ‘성공’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성장이 멈춘 게 아니라,
성장의 방향이 바뀌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13장. 결국, 다시 나로 돌아왔다

중국 생활을 통해 나는 많은 걸 보았다.
세상은 넓었고, 나의 시야도 함께 넓어졌다.
기술과 경영, 조직과 시장, 문화와 사람—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 건 큰 자산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문득 막막함을 느꼈다.

평생 직장생활만 해온 내가,
이제 무엇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할까?

 

그때 생각난 삶의 클리셰 한 줄.
“인생의 모든 답은 책에 있다.”

 

아이들도 많이 자라,
이제 아빠의 손길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고 느낀 나는
퇴근 후, 주말마다 책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2~3권이면, 1년에 100권 이상.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가장 절박한 주제부터 시작했다.
‘먹고 사는 문제’, 바로 투자.
돈을 지켜야 했고,
노후를 준비해야 했고,
경제적 자유를 꿈꾸고 싶었다.

그래서 투자 관련 책을 100권쯤 읽었다.

그런데... 알게 되었다.
“이건 잔재주로 될 일이 아니구나.”

투자의 가장 큰 변수는 시장도, 기업도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탐욕, 공포, 조급함, 착각, 집착...
내 안의 수많은 감정과 판단 오류가
투자를 망치고, 삶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책 속의 성공자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방향을 바꿨다.

자기계발서, 철학 고전, 인문학, 심리학, 영성서적...
즉,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투자를 넘어,
이제는 나 라는 사람을 다시 설계하고,
다시 세우는 여정
이 시작된 것이다.

 

14장. 성공의 정의가 바뀌는 나이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책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어느덧 50대에 접어들면서,
내 생각은 자연스레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 꼭 임원이 되어야 성공한 직장생활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수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했고,
여러 분야의 동료들과 부딪히고 웃고 싸우고 또 일했다.
그 과정에서 지식도 쌓았고, 경험도 쌓았고, 무엇보다 정(情)도 쌓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주어진 범위 안에서,
멋진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일하는 것.
그 자체가 성공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제품기획과 프로젝트 매니저(PM)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전엔 조직의 성과, KPI, 수익성, 효율성을 향해 달렸다.
그것이 당연했고, 맞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나는
‘조직의 성공’을 위한 PM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성장’을 위한 PM이 되고 싶다.

프로젝트가 잘 되면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성장하고, 배움이 남고,
함께하는 기쁨이 쌓이는 일.

그건 회사 안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
일과 삶, 조직과 가족,
모두를 하나의 프로젝트로 바라본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은
성공을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설계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기획자로,
다시 PM으로,
그리고 다시 ‘삶의 설계자’로 서 있다.

 

삶의 1막 끝에서, 2막의 문 앞에 서다

성인이 되어

자동차공학을 배우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가 되고,
현장을 누비며 실력을 쌓고,
사람을 이끌고, 조직을 설계하며
사회라는 이름 아래 30년을 살아왔다.

크게 어긋난 적 없었고,

남을 해친 일도 없었고,
부끄러운 선택도 간혹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답게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성공을 좇기도 했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기도 했고,
기술이 전부인 줄 알았고,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이제,
그 1막이 조용히 마무리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건 퇴장이 아니다.
나는 지금,
삶의 2막을 시작하기 전, 문 앞에 서 있는 중이다.

아직은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느껴지고 있다.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있게 살아가는 삶.

더 높이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더 나와 맞닿아 있는 방향.

그것이 지금 내가 바라는 삶이다.

내가 의미 있다고 믿는 것을 중심에 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걸어가고 싶다.

그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조용히, 묵직하게
그 문 앞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다.

 

"이제 아빠는,
더 많이 가지는 삶보다 더 깊이 있는 삶을,
더 높이 올라가는 길보다 더 나와 맞닿은 길을 선택하려 한다.

그리고 이 마음을, 너희에게 남기고 싶다.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용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태도는 언제든 너희 손에 있다.

준비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성찰하고, 다시 도전하는
그 반복 속에 너희만의 궤적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글이 너희 삶의 어느 지점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멈춘 마음을 다시 걷게 하는 바람처럼,
작은 용기 하나를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하고,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사랑하게 되기를.

아빠는 언제나, 조용히 그 길의 뒤편에서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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