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wn-up과 존재의 책임에 대한 반성 - 미국 입국심사대에서 들은 한 마디
오늘 미국 입국심사대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You are a grown-up."
순간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뼛속 깊이 박혔다.
불쾌함 뒤에 따라온 건, 부끄러움이자 반성이었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했던 입국심사
나는 여러 차례 해외 출장을 다녔다.
2023년 마지막 미국 출장 이후 오랜만에 다시 들어선 미국 입국심사대.
예상과는 달리, 이번에는 유독 까다로웠다.
입국 목적, 방문 도시, 체류 기간은 물론,
심사관은 '호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당연히 모든 일정은 사전에 조율되어 있었고,
나는 동료들과 함께 움직이는 입장이었기에
세세한 숙소 정보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동료들이 일정과 호텔을 모두 알고 있고, 저는 그들과 함께 다닙니다.”
그러자 심사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You are a grown-up."
그 말의 뉘앙스
그는 나이를 말한 게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상 이런 뜻이었다.
“당신은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할 나이가 아닙니다.
당신이 어디서 머무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 나는 존재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grown-up 이라는 단어가 담은 메시지
‘grown-up’은 단지 ‘성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본 책임을 진 사람,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 자신의 말과 행동을 책임지는 사람
- 주어진 일정과 계획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
- 남의 안내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사람
그 순간, 나는 grown-up이 아니었다.
존재의 책임이라는 물음
존재의 책임은 단지 "실수에 책임진다"는 차원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러 왔는가?”
“내가 내 삶을 주도하고 있는가?”
입국심사는 사실 그 질문의 가장 압축적인 실전 훈련이었다.
반성은 기분 나쁨에서 시작된다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 불쾌감은
누군가 내 ‘허술한 무게 중심’을 찔렀다는 방증이었다.
불편한 말일수록,
그 말에 반응하는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된다.
grown-up 답게 준비하는 자세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온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We’re staying at the [호텔 이름] in [도시].
I'm on a business trip with my team.
Here’s the itinerary if you’d like to see it.”
그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미국 입국심사, 최근 변화된 점
2023년 이후 미국의 입국심사는 분명 달라졌다.
2025년 들어 보안 강화와 비이민 비자 남용 이슈 등으로 인해,
입국자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특히 출장자라 할지라도:
- 방문 도시 및 체류 기간
- 정확한 숙소 이름 및 위치
- 동행자 유무 및 소속
- 회의나 미팅 일정 요약
이 모든 것을 본인의 입으로 당당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의사항:
- “동료가 알고 있다”는 답변은 오히려 신뢰를 잃게 한다.
- 준비된 사람은 '신뢰'를 얻고, 준비 안 된 사람은 '의심'을 받는다.
grown-up 이라는 말 앞에서
그날 심사관은 단지 내 정보를 확인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내 존재의 태도를 확인했다.
"You are a grown-up."
그 말은 지금도 내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대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더군다나,
그 출장 일행 중 내가 가장 연장자였다.
나이가 많다는 건 가장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기대를 의미한다.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한 순간,
그 한 마디가 나이든 자의 책임을 일깨우는 회초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 건,
‘삶이 어떻고, 존재가 어떻고’
입에 담기 좋아하던 내 스스로가
정작 가장 단순한 책임 앞에서는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진심으로 묻는다.
"grown-up 이란 무엇인가.
나이인가, 말투인가, 철든 척인가?
아니면 순간마다 스스로의 태도를 책임지는 마음인가?"
그렇다.
나는 grown-up 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의미를 부끄러움 속에서 새롭게 배운다.
성년의 날, 나는 다시 어른이 되었다 - 그리고 딸의 성년을 축하하며
딸이 내 사진을 보고 말했다.
“아빠 진짜 많이 늙었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엄마 아빠의 젊음을 너희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그건 그냥 웃기려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내 시간과 에너지, 젊음을 내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 딸이 성년이 되었다.
2025년 5월 19일, 바로 오늘은 성년의 날.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성인이니, 네 삶은 네가 스스로 챙겨가며 살아야 한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네이.”
성년의 날, 나는 다시 어른이 되었다
오늘은 딸이 성인이 된 날이다.
그리고 나는 grown-up 이라는 말의 진짜 무게를 체감한 날이다.
삶은 이렇게 타이밍을 통해 말을 건다.
누군가는 성년이 되고, 누군가는 그 성년을 지켜보며 다시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 심사관은 내 정보를 확인한 게 아니라,
내 존재의 태도를 확인했다.
나는 grown-up 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의미를 부끄러움과 사랑 속에서 다시 배운다.
grown-up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우리는 단번에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삶의 질문 앞에서 매번 다시 어른이 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또 한 번 어른이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함께 growing up 중이다.
한국 성년의 날, 나는 미국에서 다시 성인이 되었다.
정말 삶이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한 번씩 진심을 일깨운다.